'장원'의 꿈이 만든 오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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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제주 차밭을 가꾸고 있는 장원 서성환. photo 오설록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라"는 경영철학으로 살았던 장원(粧源) 서성환(徐成煥·1924~

2003) 아모레퍼시픽 창업자가 지난해 10월 27일 '대한민국 기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자(獻額者)로 입성했다. 고인이 된 그가 대한민국 최고명예와 권위를 가진 전당에 헌액된 이유는 대한민국 화장품 역사를 개척한 기업가로서 나눔과 실천을 통한 사회적 책임을 다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차(茶) 문화를 복원하고 발전시킨 문화수호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 산업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1979년 주변의 반대를 감수하고 사비까지 출연해서 차 문화와 차 산업에 매진했다. 이재에 밝고 깐깐한 개성상인의 후예였던 그의 선구자적 발자취를 따라 미래를 향한 과거를 리플레이해본다.

'잘 가꾸고 다듬은 근원'이란 뜻의 '장원'을 아호(雅號)로 가진 서성환은 한국의 화장품 산업을 선도한 업계 일인자였다.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입니다"라는 말에 진심이었던 장원은 개성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義), 신(信), 실(實)이라는 삼도훈(三道訓)을 어머니로부터 뼛속 깊이 몸으로 배웠다. 장원의 어머니 윤독정 여사는 1939년 개성에서 창성상점(昌盛商店)을 열어 직접 제조한 동백머릿기름과 동동구리무를 판매하던 성공한 송상(松商)이었다. 어머니에게 일꾼으로 인정받게 된 장원이 화장품 제조법을 전수받았던 때를 상기하며 "제조법이 아니라 제조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라고 회고했다.

1945년 1월 일제에 강제징용되었다가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한 장원은 귀국을 기다리는 동안 베이징에서 군복을 염색해 팔며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온 다양한 상품을 목격하고 난세에도 작동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체득하고 돌아왔다. 해외시장의 매력을 느끼고 온 장원은 어머니를 설득해 상호를 바꿨다. 해외로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담아 '태평양상회'로 재창업한 장원은 일제의 강제동원에서 풀려난 1945년 9월 5일을 창립 기념일로 정하고 꾸준히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을 견인해오며 뷰티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라던 장원이 임원회의에서 뜬금없이 '차 사업'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 1975년이었다. 일부 임원은 자동차 산업인 줄 알고 대뜸 찬성했다가 이내 실망하고 극구 반대했다. "취미생활이면 몰라도 녹차는 사업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합리적으로 반대하는 임원들을 설득하지 못한 장원은 회의를 마무리하며 "차 사업이 당장 돈을 버는 사업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니 계속 적자가 날 것이야. 그렇지만 녹차 사업이 성공하면 태평양은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될 것이오"라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2월 열린 장원 서성환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내걸린 장원의 생전 사진. photo 오설록


임원들의 반대에도 차 사업에 나서다

장원이 식물재배에 눈을 뜬 계기는 1960년 첫 프랑스 방문길에 갔던 그라스 지역에 펼쳐진 라벤더 밭에서 받은 감동이 단초였다. 세계적 향수 산지인 그라스에서 식물이 환금작물을 넘어 문화로 추앙받는 것에 주목한 장원은 식물을 활용한 화장품을 생산하기 위한 수목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한 장원은 출장간 나라마다 고유의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에 매료돼 그들의 차 문화를 부러워했다. 한국의 차 문화와 차 산업의 원동력이 될 차밭 조성을 향한 꿈을 지울 수 없었던 장원이 결국 임원회의에서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1979년 임원회의에서 장원이 '녹차 사업 계획'을 전격적으로 공표했지만 모두가 "한국 사람은 차를 안 마셔요"라고 반대하며 시장 자체가 없음을 부각시켰다. 회사자금이 아닌 사비를 털어서 차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장원의 결단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지만, 회사 안팎에서 우려와 반대가 심했다. 10여년 동안 차 나무 재배 후보지 답사와 차나무 묘목 연구를 거듭한 장원은 제주도와 전남 강진을 최종후보지로 선정하고 차밭 조성에 나섰다.

농사짓기 좋은 해안 저지대 땅 대신에 제주도 중산간의 척박한 황무지를 차밭으로 개간하려는 장원은 혼자가 아니었다. 식물실험 재배에 특화된 허인옥(현 제주대학 명예교수)과 1961년부터 인연을 맺었지만 허인옥이 일본에 연수 간 10여년 동안 장원과 연락이 두절되었었다. 그런 허인옥을 1975년 새마을연수원교육장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차(茶)'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차 문화와 차 산업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서로를 만나 순간 합체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은 허인옥이 1956년부터 서귀포 자신의 밭에서 차나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차밭을 방문한 장원은 확신에 차 쾌재를 불렀다. 이후 돌밭으로 악명 높은 도순 지역의 황무지 약 8만2600㎡(약 2만5000 평)를 우선 매입했다. 전남 화순에서 홍화와 제충국 농장을 함께 일궜던 타고난 농부 김원경을 개간사업 실무책임자로 모셨다. 남제주군청에서 추천한 행정공무원으로서 개간작업을 경험한 박문기도 영입했다. 드림팀을 결성한 장원은 꿈을 향한 첫 삽을 떴다.

하지만 화산섬 제주도의 거친 화산회토는 장원의 개간사업을 손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현무암 흙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제주는 구멍이 송송한 현무암이 풍화토가 되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된땅'(제주방언)이 된다. 화산돌 송이로 뒤덮여 작물 재배가 어려운 흙을 제주에서는 '뜬땅'이라 한다. '된땅'은 16.8%에 불과해서 제주도민이 경작하기에도 부족했다. 장원은 좋은 땅을 주민에게 양보하고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한 거친 돌밭을 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못 쓰는 땅을 개간해 농토를 확장하는 일을 나 같은 기업가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장원의 소신은 비용과 시간과 땀을 요구했다. 수시로 고장나는 중고 불도저 한 대가 유일한 보유 중장비였다. 전기와 식수도 없이 빗물을 받아먹으며 직접 손으로 돌과 잡목을 걷어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차밭 개간을 땅 투기로 오해받기도 했다.

제주 황무지 개간해 일군 차밭 430만㎡

땅 투기라는 의혹의 시선을 무릅쓰고 장원은 제주 곳곳을 다니며 차 문화 부흥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차 사업은 농사에서 시작된다'라는 신념으로 도순과 맞붙은 강정의 황무지와 아무도 찾지 않는 서광의 불모지를 1983년에 사서 개간에 박차를 가했다. 개간된 땅에는 허인옥이 선별해 육묘장에서 삽목으로 키운 우량종 차나무가 심어졌다. 개간사업의 노하우가 무르익은 1994년부터 매입한 한남다원을 비옥한 땅으로 개간하며 더 넓게 확장하려는 장원에게 경영진이 압박을 가했다. "투자는 엄청난데 수익은 초라하다"라는 비판에 "외국보다 절대우위에 있는 다원이 필요하다"라고 장원은 역설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영진의 건의를 받아들인 장원은 와신상담의 시간을 가졌다.

2년 후 개간사업을 재개하며 한남다원을 확장했다. 20여년에 걸친 장원의 노력으로 제주는 일본 시즈오카현과 중국 저장성과 더불어 세계 3대 녹차 산지가 됐다. 장원의 꿈이 한국 최고의 차 브랜드 '오설록'을 만들었다. 현재 오설록이 제주와 강진에서 운영하는 차밭은 430만㎡(약 130만평)에 달한다. 거대한 차밭은 장원이 꿈꾸던 목적이 아닌 차 산업 개척의 준비과정이라고 필자는 본다. 장원이 사비를 털어 투자했듯이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재무장한 오설록이 세계 차 산업의 으뜸이 되어 지구인에게 '한국의 차'를 맛나게 보여주는 그날이 오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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